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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향기나는 교회</title>
		<link>https://duftendekirche.kr</link>
		<description>향기나는 교회</description>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8:12-27 &lt;베드로의 부인, 우리의 부인&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92]]></link>
			<description><![CDATA[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요 18:12-27은 제사장에게 끌려가 심문당하는 예수님과 그 곳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일상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 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이루지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인하며 &lt;죽을 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gt;고했습니다(막14:31).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감하게 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가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횃불이 대낯처럼 밝혀져 있고 창과 검을 든 병사들이 둘러 서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뭔가 화가 잔뜩 난 표정들입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종들과 바라보고 있는 베드로는 그들보다 더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종이 묻습니다.
&lt;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gt; 베드로는 &lt;아니다&gt;라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은 세 번의 대답을 모두 &lt;아니다&gt;라고 단순히 표현하지만,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을 더 강도있게 표현합니다.
&lt;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gt;(막14:71)

베드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죽음앞에서,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 베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사이에서 나의 안녕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 가요?
혹은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나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눌러버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하지는 않나요?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입술의 고백, 행동의 고백을 못하고 뒷 걸음질 치지는 않나요?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결박되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결박되시면서도 제자들은 그냥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세상 속에서 친구들과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입술로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사랑의 주님, 당신의 희생과 사랑에 입술과 행동으로 감사의 고백을 하게 하소서, 입술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ue, 31 Mar 2026 10:02: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8:1-11 &lt;하나님의 방식으로&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91]]></link>
			<description><![CDATA[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요 18:1-11절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무기는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예수님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 제지들과 종종 가서 함께 기도하시던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식사자리를 떠났던 유다가 군대와 사람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무리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나서시며 자신을 빍히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칠 제자들을 끝까지 지키려하십니다. 
하나님께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17:12)은 군인들과 무리들에게도 제자들을 보내달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희생하도라도 양을 구하려는 참 목자의 모습을 잃지않고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중에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며 품에 있던 칼로 무리들중 한 명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동을 칭찬하지 않고 책망하셨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이 어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제압하려하였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방식으로 곧 칼로 그들에 맞서려 하였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겠다며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억울함과 고통, 고난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양은 누구일까요? 
나를 배신하기도하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하기도 하고, 나의 선한 마음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보호해야할 양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양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과 슬픔을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있나요?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우리도 그들에게 아픔과 고통, 슬픔을 주고 있나요? 
예수님은 베들로에게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기에 무기로 대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잠25:21-22; 롬 12:19-21)

♧선하신 목자 예수님, 본을 보이신대로 마지막까지 보내주신 양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10:30: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7:6-16 &lt;예수님의 기도&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90]]></link>
			<description><![CDATA[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랍비들의 율법해석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안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전하는 말을 통해서 알게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곧 열매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섬김과 부활을 통해서 증명되었듯이 말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유지하며 열매를 맺기를 곧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자신을 알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 열매를 통해 성부와 성자, 성령은  영광스럽게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주님을 알고 믿고 순종하려고 세상과 싸우며 고전분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하소서,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떨치게 하소서, 쉬지 않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0:18: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6:16-24 &lt;애통이 기쁨으로&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9]]></link>
			<description><![CDATA[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 요 16:16-24절은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비유로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될 아픔과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지만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아 듣지 못합니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희망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으로 인해 큰 아픔과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곧 그 아픔과 시련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며 조롱하고 멸시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제자들의 아픔과 시련을 예수님은 해산하는 여인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해산의 고통이 뼈 마디마디가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고통을 참는 이유는 아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세상의 어떤 것 보다 큰 기쁨을 줍니다. 
해산의 고통과 출산늬 기쁨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의 근심과 고텅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해산의 고통뒤에 출산의 기쁨이 따르듯,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되면  근심 걱정, 고통은 사라집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근심과 고통은 기쁨과 소망을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숨을 내놓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제자들을 이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변하는 약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 고난 중에도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의 근심과 고난이 내일의 기쁨임을 기억하며 인내하게 하소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38: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6:7-11 &lt;보혜사 성령&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8]]></link>
			<description><![CDATA[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11절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며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도리어 유익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셔야만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는 단순한 위로자를 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잘못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의 뒤를 따르는 신자들을 변호하며 진리로 인도하는 ‘협력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핵심 사역은 세상을 죄, 의, 심판,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책망’ 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한다는 의미를 주로 어떤 것의 실체를 드러내고 폭로하여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와 불의, 심판받음을 드러내 폭로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죄임을 폭로하실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죽인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십자가) 메달아 죽여 자신들이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려했습니다(신21:22-23).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에 달림이 예수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의롭다고 도장찍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셨습니다. 
세상 임금은 죄와 불의로 세상의 사람들을 통치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사탄입니다. 
모든 사람을 생명에서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심은 그분이 참된 ‘의’의 기준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은 복잡하고 거창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보내주신 성령님,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보혜사 성령님, 세상의 복잡하고 화려한 기준이 아닌 오직 주님의 의를 따르는 분별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인위적인 제도나 의식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단순한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소서. 
이미 세상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승리를 확신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평안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36: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5:18-19 &lt;주님께 속한 자&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7]]></link>
			<description><![CDATA[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 15:18-19절은 그리스도인의 소속과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의 연관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곳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구하고자 하는 곳입니다(요3:16). 
그러나 그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배척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미움과 배척을 받고 제거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lt;서로 사랑하라&gt;는 새 계명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새계명을 실천하며 그로 인해 세상의 미움과 배척을 받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미움과 배척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자랑스러워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새계명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난다면 우리로 인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받는 미움과 배척은 우리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 세상을 사랑하신 주님,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주님, 우리는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새계명을 행함으로 당신께 속한 자임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때로는 미움과 배척을 딩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묵묵히 그 길을 가게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35: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4:15-21 &lt;성령: 사랑을 순종으로&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6]]></link>
			<description><![CDATA[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은 사랑과 순종, 
그리고 성령을 통한 성부, 성자, 성령, 그리스도인들의 신성한 연합이라는 깊은 신앙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사랑, 순종, 그리고 그것을 이루도록 돕는 성령님, 세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의지입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음과 머리, 입에만 있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로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제시하시는데, 
이는 사랑이 곧 순종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양식, 곧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곁에서 돕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부재를 메우는 단순한 대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영원히 거하며 진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입니다. 
즉,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하며, 인위적인 노력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게 됩니다. 
인위적인 노력만으로는 그 계명을 이룰 수 없기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종교 의식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계신 성령과의 인격적인 소통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는 제도보다 훨씬 역동적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거룩하게' 깨뜨리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닌 '사랑하기에 따르는 말씀'으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복잡한 종교적 절차를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을 향한 투명한 사랑과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겸손함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말씀이 의도한 가장 아름답고 단순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말씀에 반응하게 하옵소서. 
우리 곁에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깨어 있게 하시고, 주님과 연합하는 기쁨을 날마다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하며, 삶의 모든 순간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진정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33: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4:1-14 &lt;신앙의 다이어트&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5]]></link>
			<description><![CDATA[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한복음 14장 1~1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 담론 중 핵심적인 부분으로, 
예수님의 떠나심에 직면하여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이며 
또한 단순한 위로를 넘어 예수님에 대한 신적인 확신을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은 거처를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거처'는 단순히 사후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모네(monē)'는 '거주하다', '머물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적 거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러 가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는 영원한 품에 안길 수 있는 관계적 토대를 닦으셨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다는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대답하십니다. 
'길'은 추상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도덕적 지침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하고 본질적인 수단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달려 있음을 명시합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 됨'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를 통해 드러납니다. 
빌립의 질문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답하시며,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초대받음을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만이 진정한 구원의 통로임을 일깨워줍니다. 
신앙의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천국을 부동산 투자하듯 물리적 '리조트'로 오해하지 말고, 오늘 지금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천국에 우리 자리가 있는지 걱정하기보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거하실 자리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종교적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담대히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한 분께만 집중하는 단순함이 우리를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 자비로우신 주님, 마음이 흔들리는 저희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주님을 믿으라는 평안의 명령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향하는 유일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길임을 잊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성품 안에 거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25: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3:31-38 &lt;자신을 잊은 사랑&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4]]></link>
			<description><![CDATA[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 13:31-38은 예수님의 제지들을 향한 사랑과 자신이 없는 가운데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광받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며 그 새계명을 통해서 제자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고 연광을 받을 것이라고 소망을 주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예수님의 상황은 어떨까요?
3년 동고동락하던 유다는 선생님을 배신하고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팔러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제자들중의 우두머리로 언제나 충성을 맹세하는 베드로가 자신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 배신하고 저주하며 부인할 것을 아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런 슬프고 비참한 중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각지 않으시고 제지들을 생각하십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고 무덤에 묻힐때, 오합지졸이 되어 숨어 떨고 있을 그들을 걱정하시며 그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심니다.

"새계명을 지키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을 영광받으시게 하셨습니다. 
영광받으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인 &lt;서로 사랑하라&gt;는 새계명을 지키면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영광받으십니다. 
영광받으신 예수님은 순종한 제자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작은 자들아"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기 직전까지 걱정하십니다. 
곧 닥칠 십자가의 고난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권위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와 사랑과 섬김입니다. 
자신을 내려 놓은 사랑, 자신을 잊은 사랑입니다.

♧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하신 주님, 사랑하는 자들의 배신과 저주,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제자들과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당신 새계명을 순종으로 행할수 있게 하소서, "서로 사랑하라" 
성령님 인도하여 주소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23: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3:18-20 &lt;제자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3]]></link>
			<description><![CDATA[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은 가장 아끼고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이라는 아픈 현실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여줍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41편 9절(“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을 인용하시며, 
가룟 유다의 배신조차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의 성취임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 안에서 정밀하게 움직이는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사랑하고 아꼈던 아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해서 도망치며 저주를 들었습니다. 
같은 상에서 함께 떡을 먹고 마시던 사람들의 배신에 얼마나 슬프고 화가나가 절망적이었을까요? 
이 인용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닥쳐올 혼란 속에서도 당신의 정체성(I AM)을 흔들림 없이 붙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배신 당함에 대한 슬픔에 빠져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혼란스러워 구원의 길에서 떠나갈까 염려하셨습니다. 
자신보다 더 먼저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나 배신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존재와 동행을 의심하며 불만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조차 주님의 손바닥 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난과 배신에 내동댕이 치실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고난의 순간에 그 고난을 하나님께로 한 발 더 전진하는 연단의 기회로 삼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신뢰하며 묵묵히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배신과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으셨던 주님, 하나님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성취하시며 우리 삶의 주인 되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요동치는 환경이나 사람의 배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주님의 주권적인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과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당하는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주님의 동행과 인도를 신뢰하며 묵묵히 나의 십자가를 지게하소,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Mar 2026 15:22: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3:1-17 &lt;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2]]></link>
			<description><![CDATA[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1)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 13:1-17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십자가라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문턱에서, 자기 비움과 섬김의 정점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 거룩한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이 고안한 종교적 겉모습을 벗어던진 단순하고도 강력한 신앙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도덕적 모범을 넘어선 '하나님 뜻의 본질회복'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는 '자기 비움'의 실천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예수께서 직접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행위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군림이 아닌 비천한 자를 향한 헌신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듯, 주님에 의해 씻김을 받는 '참여' 없이는 그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의지나 제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겸허히 수용함으로써만 이루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인위적인 제도에서 벗어나 말씀의 본질대로 살기 위해서는, 직분과 형식이라는 의복을 과감히 벗고 '수건을 두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종교적 습관이 주는 안일함에서 나와, 내 옆의 형제와 자매의 가장 낮고 거친 부분을 닦아주는 구체적인 사랑으로 신앙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에 매여서 예수님의 씻김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이 세우시는 전통은 스승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씻기는 것입니다. 
옛 전통을 버리고 예수님이 새우신 새 전통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범으로 예수께서 스승이시면서 제자들을 씻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할 것은 스승인 예수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17).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전통의 권위, 제도의 화려함이나 의식의 엄숙함에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단순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왕이신 분이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으신 그 모습이 곧 우리가 돌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서로의 발을 씻기는 단순한 순종이 이어질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의 자기 비움이 나의 교만을 씻어내고 오직 십자가의 본질만을 붙들게 하옵소서. 
인위적인 형식에 갇힌 종교인이 아니라, 주님의 섬김에 참여하여 형제의 발을 닦아주는 참된 제자의 삶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권위가 나의 삶을 통해 증명되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단순하고 순수한 평안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Mon, 16 Mar 2026 10:54: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2:20-33 &lt;소박한 사랑, 위대한 순종&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1]]></link>
			<description><![CDATA[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4)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4)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 요한복음 12:20-33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한 알의 밀알' 비유를 통해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과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비로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세상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구원의 완성이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순종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연합하는 삶으로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집착하며 사랑하기보다 말씀의 권위 앞에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희생하며 나 아닌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런 희생을 한 사람을 영웅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희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밀알처럼 스스로를 썩혀 새로운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내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희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가장 위대한 순종이며, 가장 고귀한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직분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몇 번 통독했는지 증명서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랑뿐입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자에게 순종은 당연한 일입니다.

♧ 십자가의 영광을 통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주님, 말씀의 권위 앞에 우리를 낮추게 하옵소서.
 주님을 소박하게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는 단순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세상 속에 향기로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Mon, 16 Mar 2026 10:50: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1:38-46 &lt;돌을 옮겨 놓으라&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80]]></link>
			<description><![CDATA[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요 11:38-46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요청받는 것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2.32). 
자신들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없었던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자매는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병든 이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었지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은 알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가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의 형식은 화려하게 정성을 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팽개쳐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나 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에 빠지고 말 것을 알고계셨기 때문에.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명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이미 죽은 지 사흘이 되었다며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3-26).라는 말을 듣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라고 대답했던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돌을 옮기라는 명령에 죽은지 사흘이라며 썩은 냄새가 난다고 예수님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마르다와 같이 고백할 때도 있지만 예수님을 막아설 때도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라는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우리에게 마르다에게 했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기라는 명령과 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명령을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알고 순종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형식과 전통들에 둘러싸여서 명령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 눈에 보이는 것에 갇힌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참 생명의 주관자를 보게하시고 순종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형식, 하나님의 뜻을 담은 율법을 우상화하지 않게 하시고 그 본질을 보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Mon, 09 Mar 2026 19:30: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1:17-27 &lt;내가 믿나이다&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9]]></link>
			<description><![CDATA[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요한복음 11장 17-27절의 본문은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생명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죽은 자의 소생을 넘어선 '회복'의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부활이 먼 미래의 막연한 사건(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인격 자체임을 의미합니다.

마르다는 부활을 교리적인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와 다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시선을 교리적인 지식에서 살아계신 주님에 대한 '신뢰'로 곧 지금 현재로 바꾸려 하셨습니다.
여기서 '회복'이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다시 생명력 있게 연결되는 것을 뜻합니다.
어느 시대나 교리와 제도와 형식의 틀에 매몰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탈출하기를 원하십니다.
거기서 벗어나 말씀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단순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거창한 의식이나 조직 안에 가두곤 하지만,
주님이 마르다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한 신뢰였습니다.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은 복잡한 종교적 계산기를 내려놓고,
매 순간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말씀의 권위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대답이 완벽한 신학 논문은 아니었을지라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고백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신앙은 단순함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견고한 교리와 제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생명 그 자체와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우리가 막연한 교리의 틀에 갇혀 지금 곁에 계신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에도 부활이신 주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게 하소서.
인위적인 모든 의식보다 앞서 주님과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단순한 신앙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Sat, 07 Mar 2026 18:45: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11:1-16  &lt;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위에 머물기&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8]]></link>
			<description><![CDATA[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요한복음 11장 1-16절은 나사로의 병듦과 죽음,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하신 예수님의 반응을 통해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서 본질적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사로의 병듦과 죽음은 인간의 절망적 한계인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깊이 '사랑'하셨음에도 즉시 움직이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체가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게 하려는 의도적 기다림이었습니다. 
결국 나사로의 '잠듦'(죽음)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며,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더 깊은 차원의 '믿음'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만히 묵묵히 하나님의 음성과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힘들게하고 고통스럽게하는 문제가 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우리 삶의 위기 순간마다 '즉각적인 해결'이라는 인간적 기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위' 앞에 잠잠히 머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종종 우리는 신앙을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곤 하지만, 참된 회복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영광이 내 삶에 임하는 것을 신뢰할 때 시작됩니다. 
죽음조차 '잠듦'으로 간주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소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속적 가치관이 만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주님에대한 단순한 신뢰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램과 다르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선한 곳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끄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며 비장하면서도 엉뚱한 결의를 보였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때로는 서툴고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투른 고백조차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길입니다.

♧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깨닫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선하신 사랑을 신뢰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참된 평안과 회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오늘도 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단순하고 명료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Sat, 07 Mar 2026 09:38: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9:1-41 &lt;안식일의 법보다 빛의 생명을 택하다&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7]]></link>
			<description><![CDATA[◇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치유 사건을 통해 죄의 근원과 메시아의 신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습니다. 
제자들은 맹인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인과응보의 틀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발라 그를 보게 하셨습니다. 
맹인은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며 예수님을 하나님께부터 온 선지라고 고백하였습니다(17.31-33).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14.24). 
맹인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의 추궁에 겁먹고 두려워 대답을 회피하고 아들에게 떠넘깁니다22-23). 
이와는 달리 치유받은 맹인은 담대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협박과 사회적 소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담대히 증언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의식과 제도에 매몰되어, 진정한 빛이신 예수를 보지 못한 채 영적 소경이 되는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는 체하는 지식으로 생명을 정죄할 때, 
치유받은 맹인은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는 단순한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 메시아로 붙들었습니다. 
복잡한 신학적, 교리적 논쟁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빛을 경험한 이의 꾸밈없는 삶입니다. 
제도의 틀에 갇혀 참 빛이신 예수를 가두려 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엄숙함보다, 비로소 눈을 떠 주를 경배하는 이의 단순한 신앙이 우리를 참된 회복으로 인도합니다.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제도와 형식에 매여 생명의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권위가 되게 하시고, 우리가 경험한 진리를 세상 속에 담대히 증언하며 살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ue, 03 Mar 2026 16:01:4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8:31-41 &lt;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하라&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6]]></link>
			<description><![CDATA[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요한복음 8:31-41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참된 제자의 길과 자유의 본질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제자의 길과 자유의 출발은 예수님의 말입니다. 곧 예수 자신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단순히 지적인 가르침을 넘어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인격적인 '머무름'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깨닫게 되며, 이 진리는 우리를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는 참된 '자유'를 선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사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했으나,
예수께서는 진정한 '아들' 됨이 혈통이 아닌 말씀에 대한 순종과 죄로부터의 해방에 있음을 역설하셨습니다.

아브람함의 혈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행한 일들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혈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자랑하며 본받아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인 종교적 형식이나 배경을 구원의 보증으로 삼는 '영적 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이 유대인들을 구원하지 못했듯, 현대의 직분이나 형식적 전통 그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형식과 제도라는 울타리가 때로는 필요하지만, 그 안에 갇혀 정작 울타리 주인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예속일 뿐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투명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진리이신 주님, 우리가 인위적인 전통의 틀에 갇혀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의 혈통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온전히 깨닫고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는 참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단순하고 정결한 믿음으로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우리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Fri, 27 Feb 2026 08:01: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8:21-30 &lt;위에서 오신 분&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5]]></link>
			<description><![CDATA[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요한복음 8장 21-3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기원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섭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위'로부터 왔음을 강조하시며 세상에 속한 이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적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생명에 속한 신적 기원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사용하신 "내가 그인 줄(I AM)"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출애굽기 3장 14절과 이사야 43장 10절에 나타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표현한 것과 같은 표현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선포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의 율법주의적 틀 때문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실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예배 형식이나 복잡한 교리에 집중하기보다,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반응하려는 영적인 예민함을 갖추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정죄나 죽음의 공포에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 단순한 바라봄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고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합니다. 

♧ 위로부터 오신 주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바라보게 하소서. 
살아 계신 말씀의 권위 앞에 온전히 무릎 꿇으며,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참된 자유를 누리며, 단순하고 순전한 신앙으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hu, 26 Feb 2026 06:36: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7:37-52 &lt;목마름, 생수, 성령&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4]]></link>
			<description><![CDATA[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요한복음 7장 37-52절의 말씀은 초막절의 절정에서 선포된 생수의 약속과 이를 둘러싼 유대인들의 날선 공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에 있는 '목마름'은 단순한 신체적 갈증을 넘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의 제사 의식(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예식)을 배경으로 자신을 참된 생수의 근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배(Inner Being)'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며, 그분을 믿는 자들이 누리게 될 영적 풍요를 뜻합니다. 
39절은 이 생수가 곧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성령께서 함께 하실 권위와 생명력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 말씀의 본질보다는 외적인 조건과 제도적 틀에 매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야 한다는 미가서의 예언에 집착하여(5:2),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본래 의미보다는 자신들이 구축한 해석의 체계와 제도 속에 매몰되어 말씀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해석과 제도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영적 교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의식보다 말씀이 가르키는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견월망지해야합니다.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이지 하나님/예수님은 아닙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배에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단순한 신앙입니다. 
바울이 칭찬한 베레아 성도들처럼 말씀을 편견없이 겸손히 듣고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해석과 제도에 지나치게 매몰 되다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해석과 제도의 장벽을 허물고,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의 회복입니다.

♧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세상의 헛된 우물에서 목마름을 채우려 했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눈을 열어 주시어 오직 주님의 권위 앞에 서게 하소서.
저희의 내면에서 성령의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넘쳐 이웃과 세상을 적시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Tue, 24 Feb 2026 07:08: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 7:14-24 &lt;하나님의 영광과 율법의 근본 회복을 위하여&gt;]]></title>
			<link><![CDATA[https://duftendekirche.kr/?kboard_content_redirect=73]]></link>
			<description><![CDATA[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요한복음 7장 14-24절은 명절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신앙의 동기(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와 '율법의 근본 의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한다(18)"고 말씀하시며, 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허영심을 부리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지혜와 권위를 내세워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자신을 보내신 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기에 그분 안에는 '불의'가 없고 오직 '참됨'만이 존재합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19)"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의 문자에 매몰되어 구원이 아니라 
정죄의 도구로 삼으면서도, 정작 그 정신인 사랑과 공의는 상실했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며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안식일에 병든 자를 온전하게 고치신 예수님을 율법을 어겼다고 죽이려 함으로써 율법의 근본 의도는 잊고 형식만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먼저 우리는 우리 안의 '자기 영광'이라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역의 성과나 제도의 완결성을 추구하다가, 정작 그 일을 통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고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구하는 단순한 마음에서 큰 열매를 맺습니다. 
율법의 겉치레를 벗겨내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정죄가 아닌 치유를, 형식이 아닌 생명을 전하는 진정한 복음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를 통하여 영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의 영광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참된 음성을 가렸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문자의 율법에 갇혀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는 예배자로 서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단순하고 진실한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하소서.
성령님,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향기나는교회]]></author>
			<pubDate>Mon, 23 Feb 2026 17:43: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uftendekirche.kr/?kboard_redirect=1"><![CDATA[QT]]></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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